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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파워 게임 전쟁 1차 세계대전 발발 배경, 전쟁의 종결

by 머니아이디어뱅크 2023. 2. 18.

제1차 세계 대전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총 4년간 벌어졌던

전 세계 31개국이 휘말려 싸운 가슴 아픈 전쟁으로 20세기 이후 최초의 대규모 세계 전쟁이었다.

전사자만 무려 900만명 이었고, 민간인 사망자는 600만 명이나 되며 부상자와 불구자 및 미망인, 고아를 합쳐 5천5백만 명이라는 실로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까지 발생시켜 이는 당연히 성비 불균형 및 한 세대의 상실 등 사회 불안을 초래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배경

 

100년 간의 평화 시대 속에서 지속적인 팽창을 이룬 유럽 열감들의 제국제주의 적 팽창 정책과 그 과정에서 소외된 독일 제국으로 대표되는 신흥 제국들의 불만, 유럽 내 민족주의적 갈등 등 다수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제국을 중심으로 한 삼국 협상과 함께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리고 이탈이라을 중심으로 한 삼국 동맹이 형성되었고, 이들 두 동맹체 간의 대립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배경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형국 속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19세의 세르비아계 민족주의 혁망가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일명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되었고 이로 인해 삼국 동맹 소속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분노하여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때 세르비아를 같은 슬라부족 국가로 보호하던 삼국 협상 소속의 러시아 제국이 반발하여 총동원령을 내렸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동맹인 독일 제국이 러시아 제국과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말았다. 영국은 나름 발칸 발도의 분쟁이 전 유럽으로 번지는 것을 걱정하여 중립을 지켰으나 독일 제국이 동맹국 벨기에를 먼저 침공하자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참전을 선언하였다. 일본 제국 또한 영일 동맹에 근거하여 독일 제국에 선전 포고를 하였고 오스만 제국 및 이탈리아, 미국까지 참전하면서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세계 대전의 시작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로는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팽창,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팽창, 러시아의 발칸반도 영향력 행사 시도, 불안정했던 당시의 발칸 반도, 프랑스와 독일 간 전쟁이 바로 그 이유이다. 세르비아인들은 발칸반도에 흩어져 있던 동족들을 모아 하나의 큰 나라를 이루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발칸반도에서 영향력을 키우려는 러시아는 이러한 세르비아를 지원하였으나, 오스트리아는 현상 유지 정책을 파면서 견제하였다. 

'탕탕탕' 1914년 6월, 발칸반도의 심장부 사라예보에서 열아홉 살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죽인 것이다. 당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제국주의 정책을 펴면서 서로 더 많은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식민지 쟁탈전은 크게 두 세력의 대결로 압축되었는데, 선진 제국주의 국가 영국 중심으로 프랑스와 러시아가 손을 잡았고,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한편이 되었다. 두 세력이 북아프리카에 이어 날카롭게 부딪친 곳이 발칸반도였다. 발칸반도는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오스만 제국이 쇠퇴해진 19세기에 이르러 곳곳에서 민족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많은 민족과 종교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보니 이해 관계가 엇갈렸다. 사라예보 사건은 유럽의 화약고에 불을 붙인 셈이 되었고,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자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나섰다. 곧 동맹 관계에 따라 전선이 형성되었고, 유럽 전체가 전쟁터가 된 것이다.

 

전쟁이 시작면서 각 나라들은 국가의 영광을 외치며 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전쟁 반대를 외치던 사회주의 정당들조차 애국의 구호를 외치며 전쟁에 참전하였고, 위대한 조국을 위한다는 구호 아래 식민지 쟁탈전이라는 전쟁의 본질은 가려져 버렸다. 조국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을 안고 전쟁에 나선 병사들은 전쟁의 참상에 경악했다. 기관총, 대포, 전차 같은 현대식 무기는 무서운 파괴력을 과시하였고, 군인들은 땅을 파서 장기전에 들어갔다. 무모한 돌격 명령이 내려지자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고, 엄청난 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소모전 끝에 전선은 겨우 몇백 미터 옮겨질 수 있을 뿐이었고, 독일과 프랑스가 맞선 서버 전선의 마른 평원에서 벌어진 참호전은 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후방의 경우도 안전하지 않았고, 전선뿐만 아니라 모든 곳이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들은 군수품 생산에 동원되었고, 전쟁 물자를 우선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물자가 통제되었으며 식량조차 배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야말로 전후방 모두 총력전이 전개된 것이다. 유럽 나라들이 차지한 식민의 민중은 제국주의 전쟁에 필요한 군인과 군수품을 공급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가혹한 수탁에 시달렸다.

 

전쟁의 종결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정부에 반대하는 운동이 각국에서 일어났다. 평화와 빵을 요구하며 전제 군주제를 타도한 1917년 러시아 혁명은 단적인 예로 러시아 혁명 정부는 독일과 강화 조약을 맺고 무조건 전쟁 중지를 선언한다. 해군력에서 밀렸던 독일 또한 잠수함을 이용하여 영국 해안을 봉쇄하고, 군함은 물론 민간 상선까지 마구 격침시킴으로써 영국 배에 타고 있던 미국인 128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미국은 전쟁 참가를 결정하게 되었다. 유럽이 전쟁하는 동안 미국은 군수 물자를 팔아 엄청난 이윤을 챙김으로써 세계 최강대국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런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은 전쟁 상황에 바꾸기에 충분하였고,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후회하기 시작하였으며 독일 편이었던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이 먼저 항복한다. 1918년 독일 해군의 항명으로 폭동이 일어나자 오랜 전쟁으로 지쳐있던 독일 민중도 호응하였고, 독일 황제는 네덜란드로 도망갔으며, 독일은 새로운 공화국을 수립하게 되었다. 1918년 11월 독일 공화국은 무조건 항복을 발표함으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고, 세계 지도는 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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